[펌]샤츠슈나이더에 대한 너무도 강력한 공격

2012-04-02 23:42:32, Hit : 3473

작성자 : 123
출처:http://blog.naver.com/blitzjack?Redirect=Log&logNo=10094570562

처음에 제목인 절반의 인민주권 The Semisovereign People 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현재 인민주권이 절반밖에 발휘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적이고 우려섞인 의견 표명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그러한 현실을 만들게 된 조건과 그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민의 주권에 대해서 나와 유사한 지적 궤적을 따른 사람들은 유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떤 배경으로 마련되어 있을 것이고 아마도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이 책의 제목을 보면 그렇게 보리라고 여겨진다.




너무 가볍게 스치듯 읽어버려서 내용의 통합적인 이해가 많이 부족한 상태인데 많은 피드백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7장까지는 별 생각도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8장을 읽고 나자 지금까지 별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문장들이나 샤츠슈나이더의 이해를 담고 있는 내용들이 8장을 중심으로 진형을 형성하면서 갑작스러운 혼란과 동요로 나를 몰아넣었다. 8장의 제목이 바로 '절반의 인민주권'이다.




8장의 논의를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인민이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과 통치한다는 것은 다르다.

2. 인민에 의한 통치가 민주주의의 근원이자 본질이라는 개념 규정은 낡은 관념에 근거하는 것이며 현실과 다르다.

3. 인민이 정치, 정치과정, 정치의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4. 정치는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그것에 대한 무지한 사람과 전문가의 협력을 통해 수행된다.

5.인민의 주권은 정치가 경쟁상황에 있을 때만  의미를 지닌다. 주권이 행사될 수 있다.




어제의 술자리에서도 써먹었던 비유이지만 샤츠슈나이더와 같은 정치에 대한 이해는 스마트폰 시장에 비유함으로써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샤츠슈나이더는 정치과정을 시장 거래와 1:1로 놓고 유사성을 보이며 비교한다. 즉, 정치과정에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정책들은 본질적으로 아이폰과 별 다를바 없는 것이다. 다만 핸드폰 시장에 아이폰밖에 없다면 독점 상태에서 소비자 주권이 무의미한 것처럼 정치 안에서의 인민 주권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따라서 정치 '시장'에도 경쟁이 필요한 것이다. 더 많이 팔아주는 상품을 만든 기업이 선두를 점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많이 찍어주는 정책, 정당이 권력을 쥘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에게 있어서 수요란 어떤 의미인가? 때로는 구체적이기도/추상적이기도 한 수요는 기업이 따라야 할 기준이지만 동시에 기업은 적절한 방식과 수단들을 사용하여 소비자들로 하여금 수요를 갖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소비자의 수요에 기업이 종속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가 기업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설득력 있다. 만약 소비자 - 기업 사이의 관계가 인민 - 정치 엘리트 (여기서 엘리트는 개인 주체일수도 있고 정당이나 이익집단 같은 집단들일 수도 있다. 물론 샤츠슈나이더의 논의는 정당을 중심에 놓고 진행된다. ) 의 관계와 속성상 1:1 대응이 가능하다면 민주주의는 어떠한 모습을 갖고 있음이 드러날 것인가?




먼저 인민의 무지가 용인된다. 샤츠슈나이더는 2억명의 아리스토텔레스로 구성된 미국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단순하면서 강력한 논지는 바로 이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폰을 사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할 때, 우리가 반드시 아이폰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한 전문적 지식은 결코 아이폰이라는 전자기기가 작동되는 기술적 지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도 좁은 범위만을 살피는 것이다. 아이폰을 고안하는 단계에서 이루어졌던 전문가들의 사회학, 심리학, 미술 기타 영역에 대해 갖추고 있었을 폭넓은 교양 그리고 그것들을 상품의 컨셉으로 전화시키는 능력, 또한 이것을 실물화하여 생산라인을 갖추고 패키지를 구성하기 까지 수많은 다른 분야의 생산을 하는 기업과 공장들이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었을 텐데. 각 과정 모두 전문지식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전체 과정을 통합하고 조율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전문성이다. 이 수 많은 전문성과 지식의 영역을 소비자가 모두 이해하고 그 안에서 진리와 정의에 대해서 살피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밨게 없다. 두번째, 살펴야만 하나? 그렇지 않다.




근대 이후의 사회는 넓은 의미의 분업이 고도로 진행된 사회이다. 샤츠슈나이더가 논하는 대로 우리는 각 분야가 필요로 하는 고도의 지식들을 다방면에 걸쳐 모두 습득하지 않아도 그것들을 모두 향유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광의의 분업화의 힘이다. 그리고 이 분업사회 내에서의 일종의 규범 혹은 신뢰가 존재하기에 이것들의 존속이 가능해진다. 아이폰의 소비자는 스마트폰 시장에 있어서는 소비자일 수 있으나 그는 자신만의 전문지식을 갖고서 다른 분야에서는 얼마든지 생산자로 기능할 수 있다.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은 모두 평등하다. 평등하지 않은 것은 그 분업 내에서 자라난 조직, 시장에서는 바로 기업과 개인들 사이가 불평등하다.기업은 한 개인보다 더 합리적이며 능력이 뛰어나고 강한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힘을 지닌 기업들을 신뢰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그것들이 존재하도록 놔둘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닌 힘도 결국 소비자들에게 상품을 판매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논의가 독점 상태가 아닐 경우에는 경쟁에 의해 소비자 집단은 더 낮은 합리성과 힘, 권력을 갖고서도 기업과 비등하게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시장 수요조차 이러한 주권적, 정치적 부분이 존재한다.




정치로 돌아가자. 정치 엘리트 (집단) 은 보통의 인민과 다르다. 그들보다 몸집이 더 크고 똑똑하며 강한 권력을 지녔다. 그러나 선거 등의 제도적 과정을 갖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결국 그 강한 힘을 지닌 정치엘리트들도 투표를 통해 인민들의 지지를 지속적으로 재확인받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정치엘리트가 스스로의 힘에 취해 인민들의 '수요'를 저버리는 행위를 반복한다면 그 정치엘리트는 곧 버려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엘리트가 대안으로 부상하여 권력을 장악한다.이와 같은 메커니즘이 존재하기에 정치적 수요를 무시하는, 즉 인민을 무시하는 정치엘리트들은 결국 사라질 것이기에 묘하게 이것은 다시 민주주의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시장의 비민주성이 언제나 지적받는 것처럼 만약 정치가 시장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 정치 시장의 비민주성 역시 대단할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독과점 정당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기업의 마케팅에 의한 수요창출이 진정 주체의 욕망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면, 정당의 마케팅에 의한 수요 창출 - 이것이 결국 옛 말로 표현하면 허위의식, 이데올로기가 될 것이다 - 의 문제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만약 정치적 주권이 시장 소비자의 주권과 유사하다면 그들의 선택이 허위적이거나 옳지 못한 것이라는 판단은 누구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일 테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정치 비판은 사라지고 적은 양이라도 결과적으로는 권력을 손에 넣어 본 자들만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샤츠슈나이더의 전략적 갈등 통제에 대한 이론은 사실 현실 속에서 권력을 잡는 것은 매우 쉬우나, 현실 속의 소수적인 정치 분파나 이론가들의 경우는 잘못된 현실 인식 및 민주주의에 대한 관념의 오류 때문에 방법을 모르는 것 뿐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소비자의 주권이 보장받는 세계는 이상적인 세계가 아닌가? 과연 소비자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한 지식, 그리고 상품들에 대한 '올바른 소비 선택 (샤츠슈나이더에게 그렇다면 도대체 바람직한 소비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싶다. 죽었나? ) 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 등을 충분한 수준으로 갖도록 만들고, 소비자들이 그런 지식 수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고 기업의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 기업들 사이에서 시장의 원리에 따른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누구나 떠드는 내용이지만 소크라테스 5천만명으로 한국을 채우는 것보다 현실적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샤츠슈나이더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현실에서 그의 말마따나 이상주의적인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이 결코 시민들에게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 이상적 민주주의자들이 원하는 수준은 샤츠슈나이더가 정치 영역이 시장이나 다름없다고 한다면 그 시장 영역의 소비자 주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그 소비자들과 사회에게 이것 저것 요구하는 정도이다. 샤츠슈나이더는 상대방을 이상한 이상주의자로 몰아붙인 다음에 자신이 냉철한 현실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여, 그 이상적 민주주의자들의 현실적 문제제기를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리게 만든다.




물론 이상적 민주주의자들의 논의를 듣다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정치 엘리트라는 것도, 인민과 구분되는 정치엘리트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낮은 수준의 먹고사는 것과 저속한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인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부정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아마 자기들끼리만 지내 봐서 모든 인민이 다 자기들같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다. 샤츠슈나이더.. 만약 정치 시장에 소비자 주권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본다면 그건 이상주의자들이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만약 소비와 선택에 정의란 없으며 모든 것은 주관적 선호일 뿐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우리 정치가들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때부터 남는 것은 오로지 정치공학 뿐이다. 권력을 잡은 자만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샤츠슈나이더의 시각 안에는 실용주의, 그리고 일반적인 윤리와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 혹은 상대주의적인 신념이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과연 정치를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질까? 왜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이 노동당을 만들의 그들의 권익을 대변해야 하는가? 대부분 그들은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며 수행하지만, 샤츠슈나이더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들은 노동자들이 실제로 지지를 보내고 그들에 의하여 소비될때 존속할 수 있다. 그럼 현재의 한국같은 상황에서 노동자주의적인 정치엘리트는 사라져야 하는 것인가? 혹은 그에게 샤츠슈나이더는 요구할 것이다. 갈등의 범위 혹은 균열의 축을 변형시켜 자신에게 유리한 싸움을 하라고, 그것을 통해 너의 지지를, 판매량을 확대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일단 살아남아야, 팔릴만한 정책을 만들어 권력을 잡아야 스스로를 변호하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는 도식이다. 결과주의적이고 곧 기능주의적이다. 결국 판매되지 않고 버려진 상품들은 어찌되었건 실패작이고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처럼, 지지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정책과 정당들은 그것들이 인민에게 무의미했기(무의미해보였기) 때문이었다는 딱지가 붙게 될 것이다.




이것이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이 말한 것처럼 때로는 진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다.
[출처] 샤츠슈나이더, 시장 정치 Market Politics|작성자 불의 꽃





후마니타스 책을 평소에 잘 보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우연히 보게 된 글인데, 평소 샤츠슈나이더의 책을 좋아했던 저는 큰 혼란에 빠졌기에 올려봅니다. 마지막 3 문단을 반박할 수가 없군요. 저보다 좀 더 공부를 하신분이 답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펌]샤츠슈나이더에 대한 너무도 강력한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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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반의 인민주권-오류 확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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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반의 인민주권중에서 내용 확인 부탁합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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