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37년 만에 찾은 고향에서 예기치 않게 벌어진 필자의 ‘사건’을 돌이켜 보며 분노와 함께 쓴웃음을 지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따뜻하고 포근한 정서와 정반대의 그 어두운 경험 때문이다. 필자는 “그리던 고향은 아니었네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과거의 ‘고향’을 되새겨 볼 여유를 전혀 가질 수 없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밀폐된 공간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2003년 가을부터 그 이듬해 여름까지 미완으로 종결된 필자의 귀향에 대한 기억은 결국 닫힌 공간에서 강요된 일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바로 그 일 년 가까운 시간에 대한 기억은 필자 자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당시 한국 사회가 경험해야 했던 ‘집단적 기억’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지만 다시 살려내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또 이를 공유해야 할 의무를 필자는 느껴 왔다. 자신은 물론, 한국 사회와도 충분한 반성의 거리가 아직 필자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완전치는 못해도 어느 시점에서 중간 평가 같은 것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절박한 느낌 또한 갖는다.
‘미완의 귀향’이라는 주제가 담고 있는 정서는 과거와의 대화에서 얻어진 슬픈 내용이다. 어떤 결손 상태가 불러오는 멜랑콜리의 감정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이 주제를 그저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이보다는 그 어느 누구도 아직 밟아 보지 못한 미래의 땅에 관한 상상과 다가감을 귀향이라고 생각하기에 ‘미완의 귀향’은 아련한 과거에 대한 서글픈 느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미래의 꿈을 엮는 적극적 행위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제 필자에게 ‘고향’은 현재와 과거 사이의 경계선 위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 사이에 열려 있는 경계의 공간, 그 안에 있다.
‘경계인’에게 고향은 과거로의 회귀만을 의미할 수가 없다. 경계의 이쪽이나 아니면 저쪽, 어느 한 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과거의 추억 속에 살며 그 속에서 자기 존재의 뿌리를 별 어려움 없이 관습적으로, 때로는 본능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 사이의 경계에서 제3의 그 무엇을 구하려고 할 때,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도 밟아 보지 못한 미래의 고향에 우리의 생각을 천착(穿鑿)하게 할 수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유토피아, 즉 ‘없는 땅’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미래의 고향이 선에서 면적으로, 또 면적에서 공간으로 변화하며 넓어질 때 그 안에서 더욱 많은 사람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고통스러운 큰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2003년과 2004년의 경험은 제3의 열린 공간을 확충하고자 노력해 온 필자에게 정말 값진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생산적인 제3’으로서의 ‘경계인’을 이야기했던 필자가 남과 북, 또 남과 남의 경계선을 설정하고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사람들에게 다가섰을 때 그들이 보여 준 반응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반응을 경험하면서 떠올렸던 여러 생각을 어느 기회에 꼭 정리해서 남겨야겠다고 하면서도 이곳 생활이 주는 또 다른 압박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 왔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필자 개인의 기억과 한국 사회의 집단적 기억이 갖는 성격 때문에 비록 불충분한 상태지만 정리해서 일단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광기와 폭력이 난무했던 그 숨 막히던 상황과 독일에 돌아와서 느꼈던 인상을 담은 ‘비망록’은 물론, ‘대담’ 형식을 빌려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복원하려고도 했다. 그 이후에도 지속하고 있는 필자의 지적 관심들을 보여 주는 글도 함께 담았다.
여러 편린을 다시 들춰 보며 당시의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필자와 필자의 가족을 정말 따뜻하게 지켜 주었던 한 분 한 분의 표정과 음성을 떠올린다. 어떤 분들은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으면서도 우리들의 가슴 한구석을 채우고 있다. 그분 모두를, 한 분 한 분을 다시 소중하게 뇌리에 심으면서 우리가 당시 공유했던 집단적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의 아름다운 고향을 함께 만들고 싶은 뜻을 담아 이 책을 그분들에게 바친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지만 이 주위를 돌며 휘몰아치는 비바람의 위력은 무섭다. 필자가 갇혀 있던 서울구치소의 한 평 공간은 태풍의 눈이었다. 야만과 광기가 무섭게 휘몰아쳤던, 너무나도 낯선 땅에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쳐 남편과 아버지를 지켜냈던 아내와 두 아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07년 3월, 베를린에서
1부
한 경계인의 비망록
한 경계인의 비망록
1
나는 미결수 65번으로서 서울구치소의 11동 상(上)층 1호실(11-3-1) 한 평 크기의 독방에서 2003년 10월 22일부터 2004년 7월 21일까지, 그러니까 만 9개월을 보냈다. 36년 2개월 만에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된 2003년 9월 22일, 그로부터 처음 한 달은 상상도 해 보지 못한 끔찍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내게 감옥의 그 작은 공간은 광풍이 몰아치는 바깥세상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키는 일종의 피난처 구실을 했다. 역설치고는 참으로 지독한 역설이었다.
부모를 따라 난생처음 한국 땅을 밟은 두 아들은 누구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아내는 건강치 못한 몸으로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나의 석방 운동을 벌였다. 그런 아내를 도우려 두 아들은 교대로 서울을 찾았다. 그들은 서울에 있는 동안 일요일과 공휴일을 빼고 하루에 10분이 허락된 나와의 면회를 기다렸다. 창살을 사이에 둔 그 짧은 면회 시간으로는 감옥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에 대해 충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하루는 두 아들이 조심스럽게 내가 들어 있는 감방의 구조와 그 속에서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를 물었다.
감옥이라는 공간은 그 속에 갇혀 있는 사람과 이들을 감시하는 직원 이외에는 접근이 금지된 특수한 장소다.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른바 근대적 이성에 의해서 억눌리고 추방된 이성(理性) ‘밖’(dehors)의 세계인 감옥을 분석한 푸코(Michel Foucault)도 사실 그의 저서가 출간될 때까지 감옥 내부를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감방은 변호사를 제외하고 외부 사람들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73년 말에야 그는 미국 인디애나주 아티카(Attica) 시에 있는 교도소를 방문, 처음으로 그 내부를 볼 수 있었다.
2
병영, 정신병동, 감옥, 학교와 같은 ‘총체적 제도’(total institution)에 대한 푸코나 고프먼(Erving Goffman)의 이론을 강의했지만, 하루아침에 한 평 크기의 감방에 갇혀서야 정작 나 자신도 그 좁은 공간 속에서 보내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다.
한 평 크기의 공간에서 잠시 빠져나올 수 있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중하다. 공휴일을 뺀 평일의 10분간 면회와 한 시간 운동이 허락된 때가 가장 기쁜 곳이 거기다. 특별 면회라고 해서 독일 영사가 매주 한 번 찾아오고, 때로는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들과의 특별 접견도 있다. 변호사와의 면회 시간도 있다.
어떻든 감방을 잠시라도 벗어날 수만 있으면 무조건 행복한 시간이다. 며칠 쉬게 마련인 명절에는 감방에서 나올 수 없다. 밖의 세계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3
독방 안에 갇혀서 매일 기다려지는 것은 편지다. 가족, 친지 또는 생면부지의 독자나 후원자로부터 받는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시간은 구치소 밖의 세계에 접속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때 받은 편지와 책들이 10여 상자나 되었는데 독일로 돌아올 때 가져왔다. 방 한쪽 벽을 꽉 채운 이 책들의 첫 장에는 나의 수인번호 ‘65’라는 숫자가 적힌 ‘개인도서확인필증’이 붙어 있다.
수감된 며칠 후 광주에 사는 한 애독자가 보낸 책을 받았다. 그중 한 권은 광주의 사진첩이었다. 그 속에는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사진도 들어 있었다. 구치소를 나온 후 광주를 방문했을 때 그 근처를 돌아보았으나 감방에서 경험했던 그때의 느낌을 되살릴 수 없었다. 광주를 떠난 지 45년 만이니 당연하기도 하다. 또 내가 다녔던 광주서중학교의 건물은 이미 없어졌다.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은 그대로 남아 있어 그곳에서야 옛 기억을 겨우 되살릴 수 있었다.
광주를 거쳐 40년 만에 제주에도 하루 들렀다.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속에 나오는 도두봉(道頭峰)만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었던 고향 마을은 이제 횟집만 즐비하게 늘어선, 제주시의 외곽으로 변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된 공간의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4
다시 구치소 시절로 돌아가, 무엇을 하며 그 지루한 나날들을 보냈는가. 검찰에 출두하거나 공판이 열릴 때는 사실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었다. 심문이나 재판 준비 때문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진행되는 일에 귀중한 시간을 탈취당하고 있다는 분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고통의 시간이라면 이를 잘 활용해야겠다는 일종의 손익계산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날부터 지금까지 학교 밖에서 보낸 시간이 없는데 처음으로 그런 시간을 가졌다. 가르치는 일은 할 수 없지만 책 읽고 글 쓰는 것은 계속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40년 가까이 의자 생활을 하다 보니 방바닥에 앉아서 책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조그마한 걸상을 신청했는데 다른 재소자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허용되지 않았다. 독일 영사는 수감 중인 미군 병사에게는 책상은 물론 침대와 냉장고 시설까지 허용하면서 저술이 본업인 독일 대학의 교수에게 최소한의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구치소를 나올 때까지 의자 반입은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5
이러저러한 일과로 분절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사실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해 글로 옮기기가 어려웠다. 나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시자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옥중수고 곳곳에 스타카토처럼 단절된 문장을 남긴 이유를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면회 온 백기완 선생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시를 한번 써 보라 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도 사고의 경험으로부터 속에서 “시적인 표명은 지상의 생멸(生滅)하는 것들을 하늘 아래서 신적인 것 앞에 서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적인 영감이 부족하다 보니 시를 쓰는 것은 무리였다. 너무 산문적인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는지.
문학사에는 시와 산문을 결합할 수 있었던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하이네(Heinrich Heine) 그리고 브레히트(Bertolt Brecht)와 같은 본보기도 있다. 하지만 시와 산문, 직관과 분석의 결합 역시 당시의 내 조건에서는 어려운 이야기였다. 고작해야 짧은 편지와 공판 준비를 위해 무미건조한 글밖에는 쓸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나였다. 물론 훗날을 위해 많은 메모를 했지만 다시 들여다보니 왜 그때 그러한 메모를 남겼는지 기억을 되살릴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6
좁은 공간에 갇혀, 언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스스로 자신에게 던진다. ‘조폭’들이 여러 명 수감되어 있는 감방에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내뱉는 거친 욕설조차 나의 질문을 대신하는 것처럼 들렸다.
원래 시간은 묘한 것이다. 알 것 같으면서도 정작 설명하라면 모르는 것이 시간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고백록에서 지적한 적이 있다.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소설 모모도 “하나의 커다란, 그러나 아주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이 가담하고 또 알고 있으나 소수만이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대부분은 이것을 그저 단순히 받아들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비밀이 바로 시간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시간의 비밀을 감옥에서 나는 절실하게 느꼈다.
조주선사(趙州禪師)는 시간에 끌려가지 말고 시간을 사용하라고 가르친다. 그저 자신이나 객관에 끌려가는 욕망과 분노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도 객관도 사라지고 따라서 욕망도 분노도 사라지는 시간의 정적(靜寂)을 그는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이전’도 ‘이후’도 없는 ‘본래적 시간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 그래서 그러한 시간을 갖고자 선이나 요가도 해 보았다. 그러나 시간에 끌려가지 않고 시간을 사용하는 경지가 얼마나 힘든가 하는 사실만 새삼 터득하고는 말았다.
7
내가 갇힌 감방은 태풍의 눈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이 정적의 주위를 맴도는 바깥세상의 폭풍은 사나웠다. 역사 속으로 벌써 사라져야 할 냉전이 위세를 다시 떨치고 그 속에서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렸던 세력이 총동원되어 나를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라며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단하라고 나섰다.
이러한 분위기를 조직적으로 끌어가는 세력의 중심에는 거대 언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구치소 문을 나오면서 이를 ‘썩은 내 나는 신문’이라 불렀다. 1심 최후진술에서 나는 ‘지식이 사회를 멍청하게 만든다’는 주장을 인용했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식 정보사회를 지배하는 언론의 선정주의와 상업주의 그리고 무책임성을 겨냥한 것이었다.
정작 재판이 시작되고 나니 끈질기게 매달렸던 그 많은 기자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말고’ 식의 언론의 관행을 정말 실감할 수 있었다. 사건에 대한 심층 분석과 재판 과정에 대한 지속적인 추적 보도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이상한 작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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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보사회 이론가 레비(Pierre Lévy)는 가상공간(Cyberspace) 속에서 육체와 영혼, 충만과 공허 그리고 물(物)과 물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새로운 경지가 열리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디지털 열반’이라고 불렀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해탈의 경지가 가상공간에서 현실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한 평의 공간에 갇힌 몸이었지만 그래도 떨어질 수 없는 영혼의 안식을 위해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몸은 이 세상에 내린 닻이다”라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말처럼 좁은 공간에 갇힌 몸을 떠나 영혼이 얼마나 자유스러울 수 있겠는가.
9
공간과 시간이 날이 갈수록 응축되는 지구화 과정은 그 작은 공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구속되자 세계의 언론은 즉각 반응을 보였다.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된 서울구치소의 공간 ‘11-3-1’이 ‘흐르는 공간’이 되어 세계시민사회(Weltbürgergesellschaft)라는 커다란 그물망의 한 고리를 형성하게 된 것을 느꼈다.
국제엠네스티, 수많은 ‘학문공동체’의 성원들, 나의 스승이었던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Günter Wilhelm Grass), 바이체커 대통령(Richard von Weizsäcker)의 친형으로서 독일이 낳은 걸출한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칼 바이체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 현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성으로 불리는 촘스키(Noam Chomsky) 그리고 미국의 비판적 사회과학도의 상징인 하워드 진(Howard Zinn)과 같은 저명한 인사들은 물론, 이 지구촌 안에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한 번도 본 적도, 또 만난 적도 없던 수많은 사람이 세계시민사회의 수많은 크고 작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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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은 ‘연화장 세계해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작은 티끌 안에서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광경을 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화엄경은 또 개체와 개체는 서로 대응함으로써 서로 타(他)를 포함하고 동시에 서로 타에 포함되는 사사무애(事事無碍) 또는 주변함용(周偏含容)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40년 이상을 감옥 안에서 보내야만 했던 비전향 장기수의 삶은 이러한 화엄의 세계를 한갓 부질없는 공담(空談)으로 만든다. 내가 있으면 너도 있다는 연기(緣起)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깨닫게 된다면 그러한 비인간적 세계를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용인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나를 가둔 그 닫힌 공간과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그 시간은 어느덧 나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공간과 시간의 은밀한 의미를 다시 깨우치게 하였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 ‘열린 공간 속의 흐르는 시간’이 된 것이다.
11
나의 1심 모두진술에 대해 모 신문은 법정은 대학 강의실이 아니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때 법정에서 나는 고향 이타카(Ithaca)를 찾아 사이렌의 꼬드김을 이기려고 자기 몸을 돛대에 묶어 지중해를 10년 동안이나 방황했던 오디세이 이야기를 꺼냈다.
독일에 다시 돌아와 지친 심신을 달랠 겸 가족과 함께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 고조(Gozo)를 찾았다. 바닷가 절벽에 있는 동굴―오디세이가 한동안 머물렀다는 전설이 깃든―에서 지중해의 검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나온 후 짧은 하루를 보낸 제주도의 검푸른 바다를 떠올렸다.
과거의 고향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미래의 고향을 찾았던 나의 뱃길은 세찬 풍랑을 맞아 닻을 온전히 내리지도 못했다. 그 사실이 넓은 지중해를 바라보는 나의 가슴 한편을 조였다. 나는 아직 귀향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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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열어 본 컴퓨터의 한글 파일 속에 2003년 9월 19일 자로 발표된 나의 ‘귀국 성명’이 보였다. 내 손으로 직접 쓴 것 같지도 않고 아니면 까마득히 먼 옛날에 쓴 것 같기도 한 길지 않은 글을 읽어 내리는데, 지난 시간이 다시 나의 뇌리를 이리저리 휘젓는다.
37년 만에 고향을 찾으면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강산은 이미 네 번 가까이 변했고, 이에 따라 사람도 역시 많이 변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번에도 저의 고향 방문을 가로막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꼭 성사시켜 보려 했던 것은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그래도 변치 않은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이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바람이 현실과 부딪히면서 부정될 수도 있지만, 37년 만에 고향을 찾는 오늘의 제 심정입니다.
짧은 일정이지만 어떻든 정말 보고 싶었던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의 내일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려 합니다. 그래서 민족 분단으로 여전히 허리 잘린 조국의 남과 북 사이에서, 그리고 날로 좁아져 가는 지구촌의 동과 서 사이에서 오랫동안 경계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미래를 위해 극히 소중한 것들을 가슴 깊이 새기려고 합니다. 특히 독일 통일을 현장에서 지켜본 저에게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상념을 더욱 가다듬게 할 수 있는 그러한 귀중한 시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저와 제 가족이 고향을 방문해서 자손의 최소한의 도리를 할 수 있도록 그야말로 깊은 애정 속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주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의 여러분께 우선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이 그동안 보여 주신 뜨거운 신뢰와 성원이 없었더라면 저와 제 가족은 이미 고향 방문의 꿈을 접었을 것입니다. 아직 해외에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하는 많은 분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특별히 기억해 주시고 계속 성원과 지지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3년 9월 19일 베를린에서 송두율
출발 이틀 전 베를린 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글이다. 37년 만에 고향을 찾는 기대와 함께 어딘가 한구석에 긴장이 도사리고 있음을 예민한 사람들은 당시에도 느꼈을 것 같다. 그러한 예감은 불행하게도 며칠 후 적중했다. 귀국 두 달 전쯤 서울로부터 누군지 모를 사람이 전자우편으로 나에게 보내준 시를 떠올렸다. 이백(李白)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읊었던 두보(杜甫)의 시였다.
死別已呑聲, 生別常惻惻.
江南𤸆癘地, 逐客無消息.
故人入我夢, 明我長相憶.
君今澱網, 何以有羽翼.
恐非平生魂, 路遠不可測.
魂來楓林靑, 魂返關山黑.
落月滿屋梁, 猶疑照顔色.
水深波浪闊, 無使蛟龍得.
사별이라면 이미 곡성을 삼켰겠지만, 생이별이라 마냥 슬프기만 하네.
강남은 열병 몰아치는 땅이건만, 쫓기는 그대 아무 소식도 없구나.
옛 친구 내 꿈속으로 살며시 들어와, 오랫동안 서로가 그리워했음을 알겠네.
그대는 지금 그물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날개를 지니고 있는가.
평소에 그대 모습 아니거니, 길은 먼 것 같아 잴 수조차 없구나.
혼이 올 때는 단풍 숲이 푸르렀는데, 혼이 돌아갈 때는 관산이 어둡네.
저무는 달빛은 지붕 위에 걸려 있어, 수심 가득한 얼굴빛 내비치네.
물 깊고 성난 파도는 거치니, 부디 교룡에게 붙잡히지 말게나.
그가 걱정한 대로 나는 귀국하자마자 반세기 이상이나 분단을 먹고 살아온 교룡들의 사나운 발톱에 걸리고 말았다. 성명서를 다시 읽어 내려가는 중 ‘경계인’이라는 단어가 또 눈에 밟힌다.
13
나의 귀국과 함께 시작된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 한국에서는 그때까지 생소한 단어였던 ‘경계인’이 화제가 되었다. 서울구치소에서는 매일 아침 7시부터 한 시간 정도 SBS 라디오의 ‘이숙영의 파워 에프엠’을 청취할 수 있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라디오를 끌 수 있는 장치가 감방 밖에 있기 때문이다.
방송 진행자가 작년에 유행했던 <말. 말. 말> 가운데 ‘경계인’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특별히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다. 남북에 양다리를 걸친 ‘회색분자’나 ‘기회주의자’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았다. 국가정보원이나 검찰의 조사 과정에서도 그렇고, 재판 과정에서도 자주 나는 이 단어의 진정한 뜻을 전달하려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나의 큰아들은 일본에 머무르다 독일로 돌아오는 길에 서울을 들러 나의 석방을 위해 애쓴 분들을 만나 감사의 인사도 직접 전하고, 또 열 달 동안 우리 삶의 흔적을 일일이 찾아보고, 노래하는 그룹 ‘W’(here The Story Ends)를 만나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을 선물로 받아 왔다. 그룹 멤버 세 사람이 직접 서명해서 보낸 앨범에는 나를 생각하며 창작한 ‘경계인’이라는 곡이 들어 있는데 ‘경계인’을 다음처럼 잔잔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나의 눈은 밝고 나의 귀는 항상 세상을 향해 열려 있으니
불안하지 않아 두렵지도 않아 언제나처럼 바람이 부는 이곳에서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바로 그 길을 선택했으니
때론 끌어안고 때론 구별하며 나의 진심과 나의 균형을
노래할 수 있는 자유
지루한 다툼 차가운 그늘 속에도
나의 진실은 여기 맴돌고 있으니
이젠 사라지길 부디 그러하길 너의 이름과 너의 기억들
다시 보게 되길 나를 달래주던 제주의 바다 또 빛의 대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14
2003년 10월 22일 전격적으로 구속되기 며칠 전, 지인들과 함께 들른 어떤 식당 앞 화단에 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아내는 그 씨를 독일에 가서 심겠다고 받아 두었다. 나도 몇 개를 내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일조량이 적은 독일에서는 잘 자라지 않겠지만 혹시나 해서 씨를 받아 둔 것이다.
구치소에서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은 어느 날 출정을 위해 입은 양복 주머니 안에서 나는 그때 넣어 두었던 씨 두 개를 우연히 발견했다. 씨 뿌리는 시기를 놓치면 일 년을 더 기다려야겠기에 내가 자주 이용했던 조그만 운동장 한구석에 심었다.
여름에 접어들고 한 뼘 이상 키가 자란 것을 확인했지만 2004년 7월 21일 자로 석방되면서 그 분꽃과도 헤어졌다. 그 여름철에 많은 꽃을 피워 조그마한 공간 속에서 자유를 애타게 그리며 운동하던 재소자들에게 특별한 기쁨을 주었으리라.
사실 서울구치소에도 곳곳에 꽃이 많았다. 꽃과 잡초가 사방 벽을 따라 자랐다. 그중에 옛날 서울에 있었을 때는 보지 못했으나 유럽에서는 많이 볼 수 있는 노란 꽃이 있었다. 처음에는 꽃의 이름을 몰랐으나 우연히 신문을 통해 이미 전국적으로 상당히 보급되었으며 루드베키아(Rudbeckia)라 불린다는 사실도 알았다. 재작년 시카고에 들렀을 때도 볼 수 있었던 이 꽃은 북미주가 원산지다. 스웨덴 식물학자이자 해부학자로서 우리 몸의 임파선 체계를 발견한 루드베크(Olof Rudbeck)의 이름을 딴 꽃이다. 유럽에서는 이 꽃이 2미터 정도까지 자라는데 한국에서는 어른의 허리춤 정도에 그친다.
내가 구치소에 갇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신문기자가 넣어 준 책 속에 이른바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오랜 옥살이를 했던 황대권 씨의 야생초편지가 있었다. 이 책에서는 루드베키아도 일찍이 한국에 들어와 토종처럼 친근해진 코스모스의 반열에 들어설 날이 올 것이라 적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진한 황금빛 꽃잎이 주는 강한 인상 때문에 이 꽃이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꽃도 그렇지만 인간도 자기 생명체를 보존하려면 그를 둘러싼 환경에 늘 적극적으로 적응해야만 한다. 1967년 여름, 5년 정도를 기약하고 밟은 독일 땅에서 이렇게 오래 살고 있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랄 때가 많다. 37년 만에 다시 찾은 강산이 변한 것은 그러니 당연하다. 사람들도 많이 변했다. 특히 엄청난 속도로 진행된 도시화는 사람들의 시각과 청각까지 많이 달라지게 만든 것 같다.
크고 작은 원색의 광고판으로 뒤덮인 시가지와 그 속에서 분출되는 소음은 서울에 대한 나의 추억을 여지없이 파괴했다. 흡사 가위의 양날이 벌어진 것처럼 한국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나는 또 나대로 서로 많이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변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 서울과 베를린이 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어떤 생산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여전히 나는 그 길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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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재독 정치학자로 소개되곤 했던, 함부르크에 사는 조명훈 씨는 내가 국정원과 검찰에서 연일 곤욕을 치르고 있던 2003년 10월 19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송두율은 하버마스 교수의 수제자도 아니고, ‘경계인’도 아닌 ‘기회주의자’일 뿐이며, 신분도 ‘교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불교신문은 불가에 귀의했다는 그를 나와 함께 반독재 투쟁을 한 사람으로 소개했지만 사실이 아니기에 나는 정정 보도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어떤 해명도 듣지 못한 채 얼마 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만을 들었다. 어떻든 그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해서 ‘조중동’과 이를 좇는 아류의 신문들까지 덩달아 나를 ‘송두율 교수’에서 ‘송두율 씨’로 바꿔 불렀다.
이 문제 때문에 서울 측으로부터 문의 전화가 너무 많아 뮌스터대학교에서는 공식 해명을 해야 했다. 당시 독일문화원 원장 쉬멜터(Uwe Schmelter) 박사는 한국 기자들로부터 오는 문의 전화마다 독일 교수직제를 이해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좌우간 ‘간첩’에 ‘가짜 교수’를 덧칠하고,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집요한 시도에 대해 독일 동료들은 머리를 내둘렀다.
사회구조가 다르면 제도도 다르고 이에 따라 호칭도 다르게 마련인데, 미국이나 일본의 대학교수직제를 모방한 한국식 호칭 구조를 강제로 독일 제도에 대입시키려는 무모함과 천박성은 가관이었다. 국정감사에서 정형근과 홍준표라는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도 조선일보가 퍼뜨렸던 ‘시간강사’ 운운하면서 자신들의 무식함을 있는 대로 드러냈다.
당시 나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우선 침묵하라는 미덕을 가르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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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서 집요하게 취조받을 때의 이야기다. 아침에 들어가면 검사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실린 칼럼을 친절하게 복사까지 해서 내게 보여 준다. 의도는 분명하다. 이른바 한국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인들이 내 문제를 밖에서 지금 이렇게 보고 있으니 잔말 말고 수사에 협조하라는 것이다.
물론 나를 비방하는 칼럼들만 열심히 보여 주었다. 제일 처음 보여 준 칼럼이 러시아사를 전공하고 주러시아 대사직을 역임한 경력을 지닌 이인호 교수와 고려대 영문과 서지문 교수의 칼럼이었다. 한때 진보 진영에서 명성을 날렸던 장기표 씨의 칼럼도 생각나는데 그밖에 다른 칼럼들의 필자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경황없는 상황에서 칼럼의 내용을 자세히 읽을 수는 없었다. 아니 읽고 싶지도 않았다. 독일에 돌아와 다시 읽은 당시의 칼럼들은 나를 ‘위선의 지식인’으로 묘사하기 위해 보기에도 딱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참된 지식인’을 정말로 필요로 했던 1970년대와 80년대의 암울했던 시기에 그들이 과연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나는 모른다. 단지 그들의 칼럼은 국정원과 검찰이 의도적으로 흘리는 수사 내용을 받아서 여론 재판을 벌였던 썩은 내 나는 바로 그 신문들의 한구석을 너무나도 잘 어울리게 장식하는 내용이었다.
들리는 소식으로 요즈음 이 교수는 ‘친북좌파의 집권으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자’는 운동에 열심이고, 서 교수도 ‘참교육을 빙자한 전교조와의 투쟁’ 전선에 나섰고, 최근에는 ‘선진화정책운동’에서 일익을 담당한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은 결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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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돌아오니 맹랑한 소식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국정원과 검찰에서 곤욕을 치를 때 이곳 중앙일보 특파원이라는 사람이 하버마스 교수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며 하버마스 교수가 내 구명 운동을 할 의향이 없다고 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가 하버마스 교수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는지조차 의심하고 있다. 구속될 때까지 머물렀던 수유리의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나는 사태를 걱정하는 하버마스 교수와 직접 통화했다. 그때 나는 내 사건에 그가 바로 개입하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 정서나 당시 여론몰이 상황에서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후에 개입해도 늦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 기자는 아직은 나설 계획이 없다는 하버마스 교수의 말을 마치 그가 나의 구명에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악의적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사태의 발전이 예상보다 급속하게 악화되자 하버마스 교수는 담당 판사 앞으로 탄원서를 보냈다. 거의 모든 신문에 보도된 이 기사는, 그러나 유독 중앙일보에는 실리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이 기자는 뮌스터대학 동료들이 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기로 한 날짜가 하루 연기되자 마치 대학 동료조차 내게서 등을 돌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기사를 다시 내보냈다. 영문 기사를 본 동료 교수가 이에 항의해 중앙일보 본사에 “객관성을 지켜라”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내자, 이 신문은 베를린 특파원이 보낸 기사를 영어로 번역해서 내보냈을 뿐이라며 무책임한 답장을 보내왔다.
독일로 돌아온 나에게 그 동료는 그런 무책임한 저질의 신문이 어떻게 한국의 대표적인 신문으로 버젓이 행세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저 ‘썩은 내 나는 신문’(Käseblätter)이라 부른다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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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희대의 정치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을 마치고 꼭 열 달 만인 2005년 8월 5일, 독일에 돌아오니 이곳에서도 신문과 방송 그리고 TV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이 2004년 10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되는 국제도서전시회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선정되어 이곳 언론으로서도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국제도서전시회가 개막될 때까지 내가 석방되지 않았더라면 연일 항의와 시위가 벌어져 주최 측은 감당하기 어려운 압력을 받았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시회 기간에 국제엠네스티 주최로 남북한의 인권문제에 관한 토론회도 열렸는데 <국가보안법>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나의 아내는 자신이 한국에서 겪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토론회 진행은 저술가이자 유명한 TV 진행자인 빌렘젠(R. Willemsen)이 맡았는데 그 역시 나의 석방을 위해 여러 가지로 힘써 준 사람이었다.
토론이 끝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는 내 문제로 한국이 얼마나 큰 문화적 손실을 보았는지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며 답답해했다. 자신의 아들이 서울에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한 소식을 항상 긴장 속에서 지켜보았다는 중년의 독일 부인은, 야만의 상징인 <국가보안법>이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나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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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돌아온 후 몇 달 지나서 뮌헨에 있는 독일문화원 본부로부터 문의 전화가 왔다. 거의 동시에 서울에 있는 독일 대사 가이어 박사로부터도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 중앙일보의 대기자 김영희라는 사람이 독일을 방문하는 기간에 하버마스 교수와 나를 만나고 싶다는데 일정을 잡아 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어이가 없었다. 1심에서 7년이 선고되자마자 그는 “자칭 ‘경계인’ 송두율의 좌절”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나에게 ‘악법도 법’이니 지키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나는 그와 만나는 데 흥미가 없다고 답했다.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의 진정한 의도는 진리를 위해서는 독배라도 들 수 있을 정도로 삶과 연결된 지혜와 참된 용기가 무엇인지를 동시대인들에게 보여 주는 데 있었다.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지적이 그에게 잘 어울리는 선문답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달을 보려 하지 않았고 <국가보안법>을 따르는 것이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사람이다.
2004년 추운 겨울, 그 많은 사람이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위해서 거리에 나섰건만 집권당은 현실 정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의무와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바로 그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을 억압해도 된다는 자기모순의 극치인 이 법에 대해 밖의 세계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길 권한다. 그리고 그런 타협이 얼마나 창피스러운 결정인지를 헤아려 보았으면 한다. 이 법의 폐지를 권고하는 일이 유엔인권위원회의 연례행사가 된 지 벌써 몇 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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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의 철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내 사건은 사법제도와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닫힌 공간은 구치소나 교도소만이 아니다. 귀국 그 다음 날부터 아침에 시작해 저녁까지 거의 일주일 동안 조사받았던 세곡동 국정원의 지하 취조실이나, 구속된 전후로 거의 두 주 동안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취조받았던 서초동의 검사실도 닫힌 공간이었다.
국정원의 어둠침침한 지하 취조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현대식 건물 안에 있는 검사실이 왜 닫힌 공간이냐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비밀 코드를 아는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으며 도주나 자해의 위험이 없는데도 수갑만 채운 것이 아니라 포승에 묶인 상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 공간이다. 구치소에 면회 온 아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아내는 너무 놀라 변호사에게 물어보았다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관행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래서 아내는 곧장 국가인권위원회와 대한변호사협회를 찾아가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했고 우리 측 변호인단도 곧이어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인권침해라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오고 국가는 피해자인 나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결론을 내렸다.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잘못된 관행 하나가 이렇게 해서 폐지되었다.
민주적 사법제도의 기본인 피의자의 변호권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검찰 조사 시 피의자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당연한 권리도 나의 변호인단과 검찰의 신경을 곤두세운 오랜 법적 투쟁 끝에 비로소 쟁취할 수 있었다. 2006년 이른바 ‘일심회간첩단사건’ 사례에서 나타난 것처럼 변호인이 심문 과정 중에 있는 피의자를 직접 조력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나의 사건을 계기로 열린 사법제도 수립에서 중요한 전기가 마련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의 법적 승리를 두고 법학 전공이었던 주한 독일대사관의 정무참사도 구치소로 나를 찾은 자리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못지않게 중요한 판례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37년 만에 귀국한 내 사례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물으며 한국의 열악한 인권 현실을 개탄했다.
송사가 잦은 독일 사회에서도 변호사 찾을 일이 없었던 나는 최고 사형까지 가능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시달리면서 법이 생계 수단인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인상적인 부류가 바로 ‘공안검사’였다.
‘공안검사’하면 나는 가끔 제정러시아 니콜라이 1세 때 부패한 관료 사회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고골리(Nikolai Vasil’evich Gogol’)의 희극 검찰관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인 가짜 검찰관 흘레스타코프처럼 허장성세하는 인간형이나, 스페인 시민전쟁 직후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전개된 사폰(Carlos Ruiz Zafon)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 속에서 피신 중인 ‘공화파’를 집요하게 쫓는, ‘피 빨아먹는 거머리’로 묘사되었던 인간형을 떠올린다.
나를 직접 취조한 검사들은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사람들이었고 위에 말한 소설 속 검사의 인상과는 조금 거리도 있었다. 그래도 ‘검사스럽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들의 특권 의식은 좀 유별난 것 같았다. 그들의 직업의식도 남달라서 정상적인 사고를 초월하는 주장이나 논거를 고집스레 자주 펼쳤다. 그래서 나는 한 검사를 향해 ‘범죄적인 상상력’을 너무 발동한다고 힐난한 적도 있다.
닫힌 사법 공간 속에서, 그리고 시대착오적 법리로서 <국가보안법>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유지해 온 공안검찰이 더욱 열린 법의 정신세계로 나올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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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만의 귀향이었던 2003년 가을부터 2004년 여름까지 내가 보고 들었던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의 모습들이 지금 재현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때보다 더 심각한 양상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2007년의 대선 고지를 향한 치열한 전투에서 ‘잃어버린 10년’을 저주하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해 온 세력이 승리해서 권좌에 복귀할지 모르겠다. 이러한 반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참여정부의 개혁 의지 실종과 무능함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심각한 사회적 내부 갈등, 남북관계, 중국의 부상에 따르는 동북아 지역 내의 헤게모니 갈등, 점증하는 지구화의 압력에 대한 대책 등 어려운 과제들이 보수 세력의 집권으로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간 스스로 과거의 보수와 구별하며 자기반성을 한다는 ‘뉴라이트’(New Right)까지 등장했다. 보수 세력이 집권해도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으로 기득권의 일방적 옹호와 냉전적 갈등을 조장하거나 미국과 일본과의 비대칭적인 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들이 그간 줄곧 이야기해 왔던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큰 재앙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
2003년과 2004년의 가을, 겨울, 봄 그리고 여름 동안 그 시끄러운 굿판을 벌여 온 네 마리의 원숭이―국정원, 공안검찰, 썩은 내 나는 신문, 그리고 위선적인 지식인―의 벌거벗은 모습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다섯 번째의 원숭이, 즉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또다시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역사는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결국 제 길목을 찾아왔고 또 앞으로도 제 길목을 찾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는 그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의 깊어 가는 고민을 멀리서도 느끼면서 그들의 건투를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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