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서문
1
이 책은 우리가 살아온 현대사이자 필자 자신의 생애사이다. 필자는 스물다섯이 되는 해 진보당 강령과 정책 문헌을 살펴보고 이내 조봉암 선생을 만나 이 나라의 민주적 발전과 사회주의적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필자는 오로지 한 가지 정치적 대안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것은 서구처럼 우리 정치에도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의 이상을 자유롭게 말하고 이를 정책으로 실현하는 정당을 만드는 일이었다.
한국 현대사가 말해 주듯, 필자의 이런 염원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여운형 선생이 주축이 된 근로인민당이든, 김규식 선생의 민족자주연맹이든, 조봉암 선생의 진보당이든, 4‧19 직후의 4대 혁신당이든 모두 좌절했다. 진보당에서 시작된 나의 정치적 실천도 4‧19 이후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을 거쳐 마지막으로 신민당 노농국장을 끝으로 종결되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말하려는 것인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와 평등을 향해 도전하는 존재이다. 인류 역사가 이를 말하거니와 가까이는 우리 현대사가 실증하는 바이기도 하다. 말할 것도 없이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가장 진취적 이상은 사회주의이다. 우애와 협동의 공동체를 향한 그 열정은 차라리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라 정의해도 좋을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사회주의는 냉전적 사고 틀로 인해 왜곡되고 억압받았다. 민주화 운동의 지도 이념 중 하나로 살아남은 사회주의는 오로지 소련, 중국, 북한의 교조적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민주적 사회주의의 풍부한 사상적‧철학적 자원은 한편으론 좌경사상으로 탄압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정주의나 개량주의로 배제되는 결과를 낳았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이념적 위기의 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기회주의로 매도되고,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좌경사상으로 억압받은 사회주의의 민주적 내용을 회복하는 일 없이 진보 세력의 미래는 개척하기 어려울 것이다.
잘 알다시피 한국 현대사에서 공산주의 이념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한 사상적 좌표로 수용되었다. 저항의 공간이 축소되면 될수록 이에 대항하는 이념은 급진적 내용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자유의 공간이 열리고 확대될수록 민주주의와 양립하는 내용을 갖는 이념으로의 분화도 필연적이다. 조봉암과 여운형을 필두로 민주적 사회주의가 분화되었던 것이 바로 이를 나타내 주고 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분화는 서구 민주주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보편적 발전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이 책에서 필자가 강조하려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왜, 어떤 계기로 분화가 시작되었는가? 공산주의로부터 분화된 사회주의의 내용은 무엇인가?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차별적 대안을 추구했는가? 그러나 결국 좌절하고 실패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들에 대한 설명을 깊이 있게 따져보는 것이야말로 민주화운동의 전통 위에 서 있는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매우 중요한 일임에도, 어찌 된 일인지 도통 관심들이 없다. 역사 속에서 미래의 자원을 탐색하려는 노력 없이, 새로운 대안이 어디선가 굴러 떨어지길 기대할 수는 없다. 해방 직후에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인간사회의 보편적 원리에 상응하고 우리가 처한 특수한 현실 조건에 깊이 천착한 대안이념을 주체적으로 모색하려는 노력은 매우 미약하다. 필자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진보적 계기들을 만나길 간절히 바란다.
3
한국 현대사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잡다한 집단들이 추종했던 이데올로기였다. 우로는 보수성을 탈각한 민족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좌로는 아나키스트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공산주의로부터 이탈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사회민주주의가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명료한 모습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 미‧소의 분할점령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박헌영에 의해 압도되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평화-통일 국가를 지향했던 세력들은 이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회민주주의 역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 출발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라는 거대한 조직체에서 출발하여 조선인민당→사회로동당→근로인민당으로 변천해 갔던 여운형 세력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세력은 조직을 달리할수록 조락의 길을 걸었고, 1947년 여운형이 암살당한 뒤에는 사실상 자체 분해되어 버렸다.
사회민주주의가 뚜렷한 이념적 좌표를 갖는 정당의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조봉암의 진보당에서였다.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던 정당은 근민당의 잔존 세력과 민족자주연맹 세력을 주축으로 한 실용적 사회주의 정당인 진보당에 이르러서야 온전히 조직될 수 있었다. 조봉암이 후보로 나서 216만 표를 얻었던 1956년 대통령선거는 진보당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진보당 역시 이승만의 자유당과, 한민당의 후예인 민주당으로 이루어진 보수 양당체제에 희생되었다. 1959년 당수인 조봉암은 법살되었고 조직은 강제로 해체되었다.
이후 이리저리 흩어진 이들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4‧19 이후 사회대중당으로 집결하여 총선거에 나섰지만, 극심한 당내 분파 투쟁과 실효성 없는 통일논쟁에 휘둘려 대패하였다. 여운형의 계보를 잇는 근로인민당 계열의 분파들은 당을 통일운동의 하위체로 상정하고 민족-자주-통일만을 외치는 것으로 일관함으로써, 애써 얻은 정치적 기회를 무위로 만들었다. 뒤이어 박정희 군사쿠데타가 있었고 이들은 정국 혼란의 책임을 뒤집어쓴 채 또다시 강제로 해체되었다. 물론 그들의 정신적 유산은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인혁당과 남민전이 그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들 역시 군사정권의 공안 통치에 희생되었고 냉전반공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는 보수 세력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과정에서 한국의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적 조직이자 하나의 뚜렷한 이념으로 정립‧발전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원인이 비단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진보 세력 내부에서의 끊임없는 분파투쟁 그리고 남북한이 통일되면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정치의 현실을 떠나 운동으로 치달았던 진보 세력의 낭만적 급진성 역시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민주화 이후의 선거에서 진보 세력은 대중에게 철저히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당을 통해 권위주의에 대항하고 정당을 통해 민주화 이후를 건설하지 못한 것, 그것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에서 진보 세력의 최대 오류였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한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초기 역사가 갈등과 분열, 반목과 좌절로 점철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도급 인사 한 명이 종국에는 하나의 분파가 될 정도로 끝없이 분열하고 지리멸렬해지는 과정을 따라 읽는 일이 너무 복잡해 대체 진보 세력의 초기 역사가 어찌 이리될 수 있는가 개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러한 양상은 지금의 진보 세력에게서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진보 세력의 최대 도전은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념적 현실성과 조직적 단결을 구체화해 나가지 못한 스스로의 무능력과 리더십의 부재에 있었다.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명분을 앞세우며 끊임없이 반목을 만들어낸 작풍의 문제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모든 문제를 분단 때문으로 보는 분단환원주의와 통일지상주의의 폐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늘 정치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운동을 앞세워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치의 영역에서 보수 세력의 영향력은 공고화되었고, 진보 세력과 대중과의 거리는 멀어졌으며,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정당의 사회적 기반 역시 소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다가 진보 세력은 시민사회에서만 목소리를 높일 뿐 정치체제의 운영은 보수 양당에 의해 주도되는 한국 정치 고유의 패턴이 고착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크다. 부디 50년 전의 실패와 좌절을 거울삼아 같은 결과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절실하다. 들여다보기 괴로울 수도 있겠지만, 앞선 세대의 진보 세력이 겪어야 했던 역정과 마주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한다.
4
이 책은 1994년 제출한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필자의 나이 예순다섯이 되는 해였다. 평생을 정치적 실천에 매진했던 필자의 경험이 정치사의 보편적 맥락을 되살리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한 공부였는데, 다행히 그 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과 관련 자료들은 1995년 세명서관에서 출간되었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한국 정치도 많이 달라졌다. 운동권 출신이 정치 영역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진보 세력 역시 민주노동당이란 이름으로 의회에 입성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진보와 개혁을 표방했던 세력들은 이내 좌표를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필자는 지금이야말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당의 길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을 채우는 일 혹은 사회주의의 민주적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 없이 현재의 혼란을 정리하기는 어렵다. 집권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일보다 여전히 통일운동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외국의 선진 이론들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앞선 선배들의 실천을 참조하는 일 역시 소중하게 여겨졌으면 한다. 이런 바람으로 이 책을 새로 내게 되었다.
애초 개정판을 내면서 통일운동 지향 세력들에 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더 면밀히 밝히고자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들 세력도 차츰 조락해 가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어 그들 세력과 인맥을 표로 정리해 두는 것 이상의 언급을 삼가기로 했다.
1995년 초판에 비해 이 책은 여러 측면에서 ‘현대화’되었다. 완전히 새로 썼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오늘의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고쳐 쓴 내용이 대부분이다. 내용은 훨씬 압축되었고, 편집도 새로워졌으며, 오늘날 쉽게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은 모두 삭제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젊은 벗들에게 감사한다.
진보정치의 뜻을 품고 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족에게 크나 큰 마음의 빚을 갖고 있다. 평생을 함께하며 언제나 내 곁을 지켜준 아내와, 이제는 제각각 가족을 이루어 살면서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자식들에게 특별히 고맙다.
2007년 8월
정태영 | 
